삼성산

산심(山心)을 잃어서인가. 아침에 두 번이나 알람을 끄고 다시 누웠어. 그냥 제낄까 싶은 생각이 들 무렵, 예전에 K가 했던 말이 떠올랐어. “너 아직도 등산하니?” 그때 받았던 충격은 머리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반항적 오기와 함께 불현듯 되살아날 때가 있어. 등산은 나에게 잠깐 하다 마는 ‘우표 모으기’ 같은 취미가 아니야. 건강을 위해서만 산에 오르는 것도 아니지. 한여름에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매서운 바람에 맞서 기다시피 설산을 오르는 건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빛, 졸졸 흐르는 샘물, 산새 울음 가득한 오솔길, 눈발 날리는 바위, 그리고 한 자국 한 자국 쌓인 수만 번의 발걸음이 결국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야. 그런 산인데, 그런 산에 가는 날인데 이런 게으름을 피우다니.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은 탓일지도 모르겠어. ​집을 나서며 딱히 길을 정하진 않았어. 삼성산으로 가되 점심공양 시간에 맞춰 12시까지는 삼막사에 도착하자. 그리고 어느 정도 땀을 뺄 만큼 올라 산과의 ‘내적 친밀감’을 갖추자. 이렇게만 정하고 관악역으로 향했어. ​8월 중순이 넘었지만 아직은 한여름의 찜통더위를 벗어나지 못할 때. 산객들로 붐벼야 할 관악역이 한가하네. 뜨거운 아스팔트를 지나 들머리에 들어서니 늦게 나온 탓에 열 시가 다 되었더라고. 삼성산은 이번이 아홉 번째인데, 이 정도면 눈 감고도 정상까지 갈 수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웬걸, 갈 때마다 헷갈려. 표준화된 탐방로가 없어 샛길이 많고, 이정표 없는 바윗길도 제법 있어서 헤매기 일쑤야. 오늘도 몇 차례 그랬어. 앞사람 따라가다 보면 낯선 길이 나오고, 새로운 길이 되었다가 다른 길로 잘못 빠져 다시 돌아오기도 했네. ​어디까지 갈까. 12시에 맞추려면 정상은 힘들 것 같고. 국기봉까지만 찍고 삼막사로 가자. 30도를 넘나드는 더위와 습기에 땀이 비 오듯 쏟아져. 수건은 이미 흠뻑 젖어 얼굴을 닦으면 눈이 따끔거릴 정도야.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것처럼 마지막 300미터를 올라 국기봉에 닿았어. 태양열 전지판이라도 두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이글거리는 햇빛. 그냥 흘려보내는 와이파이 신호처럼 아까운 이 태양광. 이런 가벼운 생각을 뒤로하며 재빨리 나무 그늘로 피신했어. ​어. 분명 국기봉에서 내려오자마자 삼막사로 빠지는 길이 있었는데. 정신이 혼미해진 건가. 한참 내려가다 일단 멈춰 서서 등산객에게 물어보고서야 겨우 길을 찾아냈어. 지금 지도를 보며 복기해봐도 정확한 트랙은 모르겠네. 열 번째 산행에서는 이 부분을 포인트 삼으리라. ​서둘러 삼막사에 도착하니 12시 20분. 공양 시간이 12시 40분까지니까 조금 여유가 있었어. 먹음직스러운 열무국수를 받아들고 식당에 앉았어. 배고픔과 갈증에 시달리던 차에 먹은 국수는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2천 원 보시하고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또한 잊지 못할 맛이었지. ​화장실에서 정비를 하고 하산을 시작했어. 언제나처럼 ‘삼성산 둘레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이제는 좀 알려진 건가. 몇 명 마주쳤네. 나만의 루트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닌 듯해. 뭔가 뿌듯하면서도 아쉬운 느낌이 들어. 오솔길을 가득 채우는 산새소리, 하늘을 덮은 나뭇가지와 그 사이로 내리는 햇빛(こもれび, 코모레비), 길섶의 야생화와 가끔 나타나는 전망 바위까지, ‘삼성산 둘레길’의 풍경은 나만 알고 있기엔 너무 아까운 것도 사실이야. ​그렇게 삼성산과의 ‘내적 친밀감’을 갖추고 이번 아홉 번째 산행을 마쳤어.

Hiking/Backpacking

Anyang-si, Gyeonggi, South Korea
Gastong photo
time : Aug 17, 2025 9:49 AM
duration : 4h 51m 26s
distance : 8.8 km
total_ascent : 553 m
highest_point : 485 m
avg_speed : 2.3 km/h
user_id : Gastong
user_firstname : 김학선
user_lastname :
산심(山心)을 잃어서인가. 아침에 두 번이나 알람을 끄고 다시 누웠어. 그냥 제낄까 싶은 생각이 들 무렵, 예전에 K가 했던 말이 떠올랐어. “너 아직도 등산하니?” 그때 받았던 충격은 머리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반항적 오기와 함께 불현듯 되살아날 때가 있어. 등산은 나에게 잠깐 하다 마는 ‘우표 모으기’ 같은 취미가 아니야. 건강을 위해서만 산에 오르는 것도 아니지. 한여름에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매서운 바람에 맞서 기다시피 설산을 오르는 건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빛, 졸졸 흐르는 샘물, 산새 울음 가득한 오솔길, 눈발 날리는 바위, 그리고 한 자국 한 자국 쌓인 수만 번의 발걸음이 결국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야. 그런 산인데, 그런 산에 가는 날인데 이런 게으름을 피우다니.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은 탓일지도 모르겠어. ​집을 나서며 딱히 길을 정하진 않았어. 삼성산으로 가되 점심공양 시간에 맞춰 12시까지는 삼막사에 도착하자. 그리고 어느 정도 땀을 뺄 만큼 올라 산과의 ‘내적 친밀감’을 갖추자. 이렇게만 정하고 관악역으로 향했어. ​8월 중순이 넘었지만 아직은 한여름의 찜통더위를 벗어나지 못할 때. 산객들로 붐벼야 할 관악역이 한가하네. 뜨거운 아스팔트를 지나 들머리에 들어서니 늦게 나온 탓에 열 시가 다 되었더라고. 삼성산은 이번이 아홉 번째인데, 이 정도면 눈 감고도 정상까지 갈 수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웬걸, 갈 때마다 헷갈려. 표준화된 탐방로가 없어 샛길이 많고, 이정표 없는 바윗길도 제법 있어서 헤매기 일쑤야. 오늘도 몇 차례 그랬어. 앞사람 따라가다 보면 낯선 길이 나오고, 새로운 길이 되었다가 다른 길로 잘못 빠져 다시 돌아오기도 했네. ​어디까지 갈까. 12시에 맞추려면 정상은 힘들 것 같고. 국기봉까지만 찍고 삼막사로 가자. 30도를 넘나드는 더위와 습기에 땀이 비 오듯 쏟아져. 수건은 이미 흠뻑 젖어 얼굴을 닦으면 눈이 따끔거릴 정도야.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것처럼 마지막 300미터를 올라 국기봉에 닿았어. 태양열 전지판이라도 두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이글거리는 햇빛. 그냥 흘려보내는 와이파이 신호처럼 아까운 이 태양광. 이런 가벼운 생각을 뒤로하며 재빨리 나무 그늘로 피신했어. ​어. 분명 국기봉에서 내려오자마자 삼막사로 빠지는 길이 있었는데. 정신이 혼미해진 건가. 한참 내려가다 일단 멈춰 서서 등산객에게 물어보고서야 겨우 길을 찾아냈어. 지금 지도를 보며 복기해봐도 정확한 트랙은 모르겠네. 열 번째 산행에서는 이 부분을 포인트 삼으리라. ​서둘러 삼막사에 도착하니 12시 20분. 공양 시간이 12시 40분까지니까 조금 여유가 있었어. 먹음직스러운 열무국수를 받아들고 식당에 앉았어. 배고픔과 갈증에 시달리던 차에 먹은 국수는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2천 원 보시하고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또한 잊지 못할 맛이었지. ​화장실에서 정비를 하고 하산을 시작했어. 언제나처럼 ‘삼성산 둘레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이제는 좀 알려진 건가. 몇 명 마주쳤네. 나만의 루트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닌 듯해. 뭔가 뿌듯하면서도 아쉬운 느낌이 들어. 오솔길을 가득 채우는 산새소리, 하늘을 덮은 나뭇가지와 그 사이로 내리는 햇빛(こもれび, 코모레비), 길섶의 야생화와 가끔 나타나는 전망 바위까지, ‘삼성산 둘레길’의 풍경은 나만 알고 있기엔 너무 아까운 것도 사실이야. ​그렇게 삼성산과의 ‘내적 친밀감’을 갖추고 이번 아홉 번째 산행을 마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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