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yang-gun, Chungcheongbuk-do, South Korea
time : Jul 1, 2025 11:36 PM
duration : 15h 20m 43s
distance : 24.4 km
total_ascent : 1745 m
highest_point : 1438 m
avg_speed : 1.9 km/h
user_id : bethewise
user_firstname : 상복
user_lastname : 박
소백산 탐방기
죽령 고갯마루에는 안개가 짙게 끼고 바람이 제법 세게 불어댄다. 그 바람이 더운 열기를 식혔는지 공기가 시원하다. 11시 30분.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채비를 갖추었다. 헤드랜턴을 켜고, 스틱을 준비하고, 등산화 끈을 조였다. 이제까지 계획은 연화봉에서 일출을 보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안개가 낀 날씨라면 일출은 기대할 것도 못되겠다. 그냥 묵묵히 걸어가다가 소백산 산신령 님이 보여주는 것만 보는 것이다.
죽령에서 연화봉까지는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다. 연화봉 바로 밑에 소백산 천문대가 있어 관리하는 사람들이나 관람하는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도로를 연결해 놓았다. 낮에는 햇볕을 피할 수 있는 나무 그늘이 없으니 걷는 것 자체가 큰 고역일 텐데 오늘은 안개 속에서 걸으니 땀도 흐르지 않는다.
낮에도 조망이 없는 길이니 이렇게 밤길을 걸어 오르는 것도 손해볼 일이 아니다. 도로를 걷다 보면 몸도 풀리니 다른 산처럼 처음부터 산길로 이어지는 것보다 좋은 점도 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걷다 보니 길 가에 꽃들이 가끔씩 나타난다. 하얗게 피어 흔들리는 터리풀이 마중 나오더니 이어서 노란 기린초 꽃이 반긴다. 그리고 도심의 정원에서는 벌써 져버린 초롱꽃이 나타난다. 길가 풀섶에 은빛으로 빛나는 풀이 무언가 불을 비쳐 보니 쑥이다. 쑥잎의 뒷면은 잔털이 곱게 나 있어 불빛을 반사해서 흰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안개가 점점 짙어 진다. 랜턴 불빛에 비친 안개의 모양이 재미있다. 아주 작은 물 입자가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흩어지며 돌아간다. 고요한 산길이다. 정말 보름달이 떠 있다면 낭만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볼 게 없으니 앉아서 쉴 명분도 없어져 우리는 계속 걷기만 하였다.
그러다 친구들과 조금 떨어져 걷는데 뭔가 어둠 속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린 내 랜턴 불을 껐다. 불빛이 반짝 반짝 날아다닌다. 틀림없는 반딧불이다. 신기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많던 반딧불이가 지나친 농약 사용에 다 사라져 버리고 이렇게 높은 산중에 날아와 나를 놀래키는 일이라니. 하지만 실수로 내 앞에 얼쩡거리던 반딧불이 두 마리 말고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몇 년 전 지리산 거림으로 하산하던 길에서는 그런 반딧불이를 여러 마리 보았는데 지금은 때가 아닌 건지 아니면 서식지 조건이 마땅치 않은 건지 모르겠다.
죽구종주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온은 떨어지고 안개는 더욱 짙어 지고 바람은 거세 진다. 나는 농담삼아 소백산 산신령 님이 칼바람 맛을 보여 주시려는 모양이라고 말하였다. 소백산을 처음 오른다는 철구는 콧방귀를 낀다. 한여름에 칼바람이라니 ! 소백산을 여러 번 다녀갔다는 열환이는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라고 한다. 한겨울 소백산 비로봉에 올라본 사람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차가운 칼바람을 이 한여름에 맞을 수 있다면 누구라도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다며 우리는 우스개소리를 하였다.
연화봉 정상에 도착하니 아직 3 시도 되지 않았다. 주변은 칠흑처럼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조형물로 만들어 놓은 태양이 덜그럭거리며 흔들린다. 데크 바닥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날이 조금 밝아질 때까지 기다리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바람이 너무 차갑다. 우리는 간단하게 배만 속이고 일어섰다.
비로봉에서 아침을 맞다.
연화봉에서 내려와 제1연화봉을 향해 가는 길은 그늘진 숲길이다. 돌계단을 조심스럽게 밟으면서 걷고 나니 물웅덩이가 나타난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잎새에 묻어 있던 물방울이 빗방울처럼 떨어진다. 길가에는 터리풀과 참조팝나무 꽃이 수시로 나타난다. 함박꽃나무 꽃이 아직도 피고 진다.
산행을 오기 전, 단톡방에 있는 꽃뱀들에게 소백산에 가면 어떤 꽃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물어보았다. 냉초, 꼬리풀, 왜솜다리, 원추리, 이질풀 등 상상의 나래를 펴고 꽃 이름을 읊었는데 어째서 터리풀과 참조팝나무 꽃은 빠져 버렸을까? 그리고 기린초는? 이는 아마도 소백산의 고유 야생화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터리풀은 지리산에 더 어울리고 참조팝나무는 설악산에 맞는다고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기린초는 아무래도 태백산이 더 많이 품고 있을 테니 소백산에는 대표적으로 냉초나 이질풀이 연상되는가 보다.
숲을 빠져나와 제1연화봉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난다. 여전히 짙은 안개에 주변은 칠흑같이 깜깜하다. 그 흔한 새소리나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바람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주위를 맴 돌 뿐이다.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으니 걸음만 빨라진다. 계단을 오르다가 전망대에 서서 잠시 쉬었다. 날이 맑으면 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밑에서 올라오던 열환이가 다리에 쥐가 났다며 쉬어 가자고 하였다. 전에도 몇 번 산행 중에 쥐가 나서 고생을 했던 터라 이번에도 힘든 산행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쥐가 한 번 나기 시작하면 쉽게 가라앉지 않는 법인데, 이제 겨우 삼분지 일 정도 지나왔는데 어쩌면 완주를 못하고 하산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열환이는 이에 대비하여 액상 마그네슘과 근육이완제 그리고 소염진통제를 챙겨왔다.
다행히 그 마그네슘 약 덕분인지 열환이의 쥐는 잡혔다.
제1연화봉을 지나고 숲을 통과하고 나니 양옆으로 확 트인 능선길이 나타난다. 여전히 우리는 짙은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은 안개를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바람에 안개를 더 많이 실어오는 것 같다. 낮에 더워진 남한강의 강물이 기화(氣化)되어 올라가 기압이 상대적으로 낮은 풍기 쪽으로 날아가는 현상일 게다.
좁은 소로를 지나갈 때는 키 작은 나뭇가지와 풀섶에 맺힌 이슬이 온 몸을 휘감는다. 바지는 이미 흠뻑 젖었고 등산화에도 물이 조금 들어간 것 같다. 길가에 냉초 꽃이 피어 있다. 곧게 올라간 줄기 끝에 꽃대가 나온 모습이 꼬리풀처럼 생겨서 구분을 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쉽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은 고인돌 형님 덕분이다. 콜롬버스의 달걀처럼 알고 나면 아주 간단한 것인데, 처음에는 그 잎차례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꼬리풀은 마주나기 냉초는 돌려나기 잎차례를 갖고 있다.
천동 삼거리 조금 못 미쳐 랜턴 불빛에 주황색 나리꽃이 비쳤다. 꽃이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아우성치는 모습이다. 나리꽃은 그 입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에 따라 이름을 달리 구분한다. 하늘나리, 중나리, 땅나리가 그것인데 이것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으니 분명히 하늘나리 꽃이다. 정말 오래 전에 대덕산 정상에서 한 번 본 이후 처음 만나는 꽃이라 무척 반가웠다. 불빛을 가까이 비춰 가며 사진에 담았다. 낮에 만나면 또 감회가 달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천동 삼거리에 도착하니 비로소 날이 부옇게 밝아지고 새들이 비로소 호로롱 거린다. 휘파람새들이 이제 깨어나는 모양이다. 이제 우리도 시장기를 느끼고 추위를 피해 주목감시초소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