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outh Korea
time : Jun 14, 2025 9:47 AM
duration : 4h 56m 3s
distance : 8.7 km
total_ascent : 711 m
highest_point : 733 m
avg_speed : 2.0 km/h
user_id : bethewise
user_firstname : 상복
user_lastname : 박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린다고 한다. 주말에 이어 일요일과 월요일까지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에 산행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뭘 할 껀지도 정하지 않았다. 시간은 정말 빨리 간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토요일을 맞았다.
날은 흐린데 비는 내리지 않는다. 일기예보를 다시 보니 오전에 흐리지만 오후에는 맑을 거라고 한다. 나를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겠지만, 나는 또 일기예보에 보기 좋게 속았다.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것 같기에 북한산과 도봉산을 놓고 어디를 갈까 고심하다가 도봉산을 택했다. 거리도 가깝고 오랫동안 가 보지 못한 산이기에.
다락능선을 오른다. 도봉산 입구에서 시작해서 숲길로 이어지고 중간중간 바위에 오르는 재미가 쏠쏠한 능선이다. 이렇게 오르는 재미가 있어서 다락능선이라고 했나? 옛날 어렸을 때 살던 시골 집에는 다락이 있었다. 수납공간이 부족한 집의 구조상 부엌 위 공간을 이용하여 벽장(壁欌)을 만들고 그 옆에 더 넓은 다락을 만들었다. 다락은 좀 귀한 것을 숨겨두는 공간이다.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높아 아이들은 접근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베개를 여러 개 쌓아 놓고 그걸 밟고 들어간다.
정말 이 능선에 있는 바위들이 다락방에 들어가는 것처럼 생겨서 그런 건가? 햇빛이 따갑다. 물 두 병을 챙겼는데 부족할 것 같은 느낌이다. 밥을 싸왔으나 좀 부족할 것 같아서 떡을 두 팩이나 샀다. 오늘은 시간에 구애 받지 말고 산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고 내려갈 예정이다.
능선을 오르다 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암릉구간이 있고 그 옆으로는 좀 뒤에 다시 만날 흙 길이 있다. 오랜만에 바위를 당기며 암릉구간을 따른다. 몸이 무겁다. 체중을 빼야 하는데 그게 맘처럼 쉽지 않다. 하루 세끼 밥을 다 찾아먹고 운동이라고는 겨우 만보 걷는 것이 전부다 보니 그 쓰고 남은 에너지는 다 살이 되어 몸 속 구석구석 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10 kg 만 빼도 날아갈 것 같을텐데 10 킬로그램은 커녕 5 kg도 못 빼고 항상 저울은 같은 숫자만 보여준다. 요즘은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말이 설득력을 잃었다. 살기 위해서는 굶어야 한다.
그런데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 벌써 시장기가 느껴진다. 관음봉(觀音峯) 바위 그늘에 앉아 설탕물에 떡 한 팩을 다 먹었다. 헤드 셋에서는 다시 시작한 러시아어 학습 내용이 계속 흘러나오지만 귀에서 맴돌다가 다시 튀어나와 공중으로 흩어진다. 책상 앞에 앉아 집중해도 잘 들어오지 않는 외국어가 이렇게 산길을 걸으면서 듣는데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하는 것이 나을 거라는 기대를 품어본다. 언젠가 멋진 러시아 여행을 하고 싶다. 아시아 끝에서 시작하여 유럽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을 밟아보고 싶다.
좀 까칠한 바위 구간을 지나고 나니 도봉산의 진정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선인봉, 만장봉 그리고 자운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세 개의 바위 봉우리가 한치의 흔들림 없이 천년 전 만년 전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 도봉산 최고의 자운봉(紫雲峰) 위에 있는 일반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봉인 신선대(神仙臺)까지 도봉산의 신비로운 바위들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도봉산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는 조망처다. 이런 봉우리 이름을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는 꽤나 자주 이 곳을 지나면서 저 바위 봉우리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저녁 노을이 질 때 자줏빛 구름을 감싸 안은 바위를 보며 자운봉(739 m)이라는 이름을 생각했을 것이고, 결코 오를 수 없는 바위 봉우리를 보며 만장봉(萬丈峯 718 m)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쪽 넓은 평원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의 바위를 보며 마치 그게 자신의 모습인 듯 싶은 생각에 선인봉(仙人峰)이라 불렀을 것이다. 지금은 장비를 잘 갖추고 앞서 간 사람들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 저 바위에 오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지만, 옛날 도인(道人)들은 나처럼 먼 발치에 서서 상상력으로 저 바위들을 오르내렸으리라. 그리고 비교적 힘들지 않은 신선대(神仙臺 726) 바위에 올라 마침내 신선이 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 자신의 인생길(道)을 찾아 때로는 반성하고 때로는 용서하고 때로는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바위를 오르고 또 올랐으리라.
만월암(滿月庵) 갈림길 위에는 나무 계단을 설치해 놓아 서쪽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오른다. 수락산과 불암산 그리고 그 너머로 천마산 줄기가 보인다. 가스가 가득 찬 공기로 인해 용문산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포대(砲隊) 정상에 있는 나무 데크 전망대에 서면 사방이 훤히 보인다. 평소 주말에는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조망을 감상하면서 점심을 먹는 자리인데 오늘은 날이 뜨거워서 그런지 사람들이 올라와 한 번 휙 둘러보고는 서둘러 내려간다. 북쪽 멀리 사패산(賜牌山)이 보인다. 오늘은 저 사패산을 넘어 의정부로 내려갈 생각이다. 남서쪽에는 북한산 만경대와 인수봉이 보인다. 백운대는 인수봉에 가려져 있다.
잠시 Y계곡 입구로 내려가 바위 풍경을 바라보며 그늘에 앉아 물을 마시며 쉬고 있는데 William 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일 귀국하는데 시간되면 차나 한 잔 같이 마시자고 한다. 원래 16일에 오기로 한 거 아니냐고 물으니 이미 12일에 와서 서울 관광을 마쳤다고 한다. 내가 날짜를 잘 못 알고 있었나 보다. 요즘 왜 이렇게 정신줄을 놓고 사는지 모르겠다. 4시에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하산을 하기로 했다.
와이 계곡을 지나고 신선대에는 오르지 않은 채 가장 짧은 코스를 택해 내려간다. 선자만(선인대, 자운봉, 만장봉) 뒤쪽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돌길을 걷는다. 반대쪽에서 보면 도저히 사람이 오르지 못할 암봉(巖峰)이지만 그 뒤편으로 이어지는 길은 경사가 급한 돌 계단 길이다.
그리고 천축사로 내려가는 계곡길을 버리고 파노라마 바위 옆 능선길을 걸어 마당바위를 거쳐 승락사로 내려갔다. 관세음보살을 반복해서 들려주는 염불 소리를 들으며 뜰에 있는 자리에 앉아 떡을 먹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아주머니에게 떡을 권하니 한 입 맛을 보더니 배 부르다며 사양한다. 절을 지나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불전함에 얼마를 넣어야 하는지 자신은 잘 모른다고 하였다. 내가 절 마당에 앉아 있으니 혹여 내가 절 사람인 줄 착각한 모양이다. 부처님은 죽기 전에 저 ‘관세음보살’을 열 번만 부르면 영혼을 극락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했다는데 형식이 뭐가 그리 중요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관세음보살 님은 눈이 천 개나 되고 손도 천 개나 되기 때문에 누가 어디에서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다 듣고 볼 수 있으며 누구나 구원을 청하면 손을 내밀어 주신다고 한다. 살아 있을 때도 그런데 죽을 때마저 관세음보살을 찾는 사람의 영혼을 극락으로 데려가는 일이야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리라. 다만, 정말 죽기 직전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 잊지 않고 관세음보살을 찾으려면 평소에 그 관세음보살을 마음 속에 깊이 새기고 살아가야만 가능한 일일 것 같다.
산을 내려와 화장실에 들러 땀을 닦고 옷을 갈아 입었다. 지하철을 타고 시청역으로 가 웨스틴 조선호텔에 도착하니 정확하게 4시다. 얼추 계산한 시간인데 이렇게 정확하다니, 이제 나의 대중교통 이력이 늘어난 모양이다. 마침 윌리엄은 명동 시장에 가서 쇼핑을 하고 방금 들어왔다면서 카페로 내려왔다. 목이 말라 커피 대신 수박 얼려서 갈은 것 (스무디) 한 잔을 마시고 나니 몸이 시원해 진다. 그와 이야기 하는 중에 우리나라 경기 전망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그는 새로 당선된 이재명 대통령에 대해 해외에서는 염려하는 분위기라고 하였다. 특히, 미국과의 관세협상과 우방국과의 협력이 잘 될까 하는 우려가 있다고 하였다. 나는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인수인계 과정도 없이 당선 하루만에 취임한 대통령이지만 이제 취임한 지 열흘 밖에 안된 지금 이미 시장이 반응하고 있고, 주가도 오르고 환율도 안정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그는 환율이 안정된 것은 자기도 동의한다고 하였다. 이재명 정부에서 코스피 지수가 5000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말하니 그가 놀란다. 오랜만에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