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angyang-gun, Gangwon State, South Korea
time : May 31, 2025 2:46 AM
duration : 12h 36m 46s
distance : 22.2 km
total_ascent : 1288 m
highest_point : 1708 m
avg_speed : 2.0 km/h
user_id : bethewise
user_firstname : 상복
user_lastname : 박
지난 5월 16일 설악산 문이 열린 이후 연속 3주째 설악산을 찾았다. 설악산이 작은 산이 아니기에 개방된 탐방로만 찾는다고 해도 며칠은 걸리는 일이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철마다 바뀌는 설악산은 갈 때마다 새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그래도 설악산은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다 여러 산악회나 대중교통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니 요즘은 날씨를 관망하다가 좋은 날을 선택하여 힘들지 않게 갈 수 있으니 참 편리한 세상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인 1930년 이은상 씨가 쓴 설악행각을 살펴보면, 그가 설악산 탐방을 하기 위해 남교리까지 이르는 과정도 그리 단순하지가 않았다. 서울에서 춘천까지 종일 달리고, 배에 자동차를 실은 채 소양강을 건너 인제에서 하룻밤을 묵고 그 다음날에야 비로소 십이선녀탕 계곡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적었다. 물론 그 뒤로도 설악산에 가는 길은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다. 내가 수학여행으로 설악산에 처음 갔던 1975년에도 버스를 타고 하루 종일 걸려서 설악동에 도착했었다.
지금은 도로가 잘 뚫려 있어 서울에서 출발하여 겨우 2시간 30분만에 설악산 탐방을 시작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시대인가? 서울 8호선 복졍역에서 자정에 산악회 버스를 타고 새벽 2시 30분에 한계령에 도착하였으니 설악산은 사실 서울의 뒷산이나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설악산에 접근할 수 있는 더 빠른 방법이 앞으로 생겨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정말 명산(名山)을 찾아가는 교통으로서는 더 할 나위가 없다고 할 것이다.
귀때기청봉의 일출
새벽 2시 30분 한계령 휴게소에 내리니 바람이 차갑다. 핸드폰에 나타난 인제의 기온은 영상 8도다. 이미 수많은 탐방객들이 휴게소 광장을 서성대고 있다. 머리에는 헤드렌턴을 쓰고 손전등을 들고 당장이라도 산으로 뛰어들 태세를 갖추고 있다. 마치 100 미터 달리기를 앞두고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이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엷은 구름층 사이로 별들이 반짝인다. 맑은 날에는 이 한계령 밤하늘에 별이 촘촘히 박혀 있을 텐데, 오늘은 구름도 약간 끼어 있는데다 주변의 불빛 때문인지 별들은 조용하다.
원래 3시에 열리는 설악산 문이 오늘은 조금 일찍 열렸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루루 달려들어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오늘은 제법 긴 산행이 될 것이다. 해가 뜰때까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다. 한계령 삼거리까지 2.3 킬로미터는 그냥 접근로에 속한다. 중간중간 거리를 표시해 놓은 이정표(里程標)가 있고 쉴 수 있는 벤치도 있지만 급한 마음에 사람들은 마라톤을 뛰듯이 바삐 지나간다. 전등불에 비친 철쭉꽃이 예쁘다. 하늘에는 별이 좀 더 많아진 것 같다.
한계령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귀때기청봉으로 가는 길이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 희미한 전등불에 의지한 채 돌길을 더듬어 간다. 숲길을 빠져나와 귀때기청봉의 돌무더기에 도착하니 새벽이 파랗게 밝아온다. 설악산 새벽은 푸른 빛이다. 가까이 가리봉이 짙푸른 빛으로 어둠 속에 숨어 있고, 멀리 점봉산이 더욱 짙은 빛으로 다가온다. 대청봉으로 향하는 검은 등줄기 끝에 대청봉과 중청봉이 실루엣으로 비친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다. 산을 오르면서 몸에 배인 땀이 금방 식는다.
2주 전에 만발했던 털 진달래는 거의 다 지고 철쭉꽃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마가목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바위에 앉아서 삶은 계란과 꽈배기 등으로 이른 아침을 먹었다. 이 귀때기청봉으로 오르는 길목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식당이 되었다. 그러다 언뜻 바라본 동쪽 하늘 멀리 새빨간 점이 나타났다. 나도 모르는 새 벌써 해가 솟아나고 있었다.
바다 위에 구름이 끼었는지 해는 구름사이로 힘겹게 떠 오른다. 해가 조금 더 올라오자 바닷물에 비친 해의 모습이 오히려 더 밝고 선명하다. 두 개의 해가 떠 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일출 쇼는 금방 끝이 났다. 해가 뜨면서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주위 풍경이 점차 모습을 드러낸다. 가리봉과 점봉산 사이 인제군은 지난번처럼 하얀 안개에 덮여 있다. 내린천이 있어서 그런건지 인제군은 늘 이렇게 안개에 덮여 있는 것 같다.
금강산(金剛山 비로봉 1638 m)
서북능선에는 지금 봄꽃이 한창이다. 철쭉꽃을 기본을 깔아놓고 그 사이사이 큰앵총꽃이 많이 보인다. 나도옥잠 꽃도 무성한 잎 위에 하얀 꽃대가 올라와 있다. 길에서 조금 벗어난 수풀에 연령초 꽃도 가끔 눈에 띈다. 자세히 보면 이 서북능선은 멋진 꽃 길임에 틀림없다.
단풍나무과에 속하는 시닥나무나 부게나무 꽃도 심심찮게 보인다. 주로 높은 산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꽃들이다. 그리고 중청봉으로 오르는 길 옆에는 이노리나무도 몇 그루 보인다. 이노리나무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날이 맑으니 주변 조망이 아주 선명하다. 혹시나 하고 북설악 너머 향로봉을 찾아보았다. 고성군의 행사 덕분에 두 번이나 가본 적이 있는 향로봉은 산 위에 설치된 군사시설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얀 탁구공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금강산 줄기가 여느 때보다 윤곽이 분명하다. 설악산의 공룡능선처럼 회갈색 화강암 암릉이 주능선을 이루고 있는 산세(山勢)가 장엄하다.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곳이기에 더욱 그리운 산이다.
다시 찾은 대청봉(大靑峯 1708 m)
귀때기청봉에 잠시 다녀온 까닭에 내 행선이 많이 늦어졌다. 끝청봉에 도착하니 8시 30분이 지났다. 소청부터는 줄곧 내리막 길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달릴 수 있는 길은 아니기에 하산에 필요한 시간도 충분히 아껴두어야 한다.
좌측으로 내설악의 아기자기한 바위봉우리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고, 우측에는 점봉산을 비롯한 푸른 빛 고산준령이 끝없이 이어진다. 나는 그 사이 귀때기청봉에서 중청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걷는다. 중청봉에서 뒤를 돌아보니 새벽에 지나온 귀때기청봉이 손을 뻗으면 금방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그만큼 귀때기청봉이 크고 우람하기 때문이리라.
중청봉 갈림길에 도착하니 9시 40분이다. 여기서 백담사까지 12.3 km 남았으니 평균 속도 시속 2 km 정도로 잡으면 6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거기에다 백담사에서 버스를 타고 용대리로 나가서 또 1 km 정도를 걸어야 하니 여기서 곧바로 백담사 방향으로 내려간다면 대략 4시경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하산 길은 줄곧 내리막 길인 점을 감안하여 속도가 더 빠를 수 있다는 생각에 대청봉 (왕복 1.2 km)에 다녀오기로 마음을 정했다. 길 가에 배낭을 벗어 두고 홀가분한 차림으로 대청봉을 향한다.
지난 중에 다녀온 대청봉을 굳이 또 찾아가는 이유는 먼 발치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털진달래 군락 때문이다. 대청봉 경사면에 붉은 색 양탄자를 펼쳐 놓은 듯 털진달래 꽃이 만발하였다. 낮은 산에는 벌써 3개월 전에 다 져버린 진달래 꽃이 이제서야 피고 있으니 그 꽃이 더욱 귀해 보인다. 털진달래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사연은 이 꽃의 잎 뒷면에 짧은 털이 촘촘히 나 있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을 나는 특별한 전략이다.
봉정암
낮이 되어도 기온은 조금 높아졌지만 여전히 바람은 시원하다. 새벽에 가라앉았던 안개가 더워진 공기에 증발되어 골고루 퍼지면서 그 맑기만 하던 조망은 조금씩 흐려진다. 원래 대청봉이나 중청봉에서 잘 보이는 금강산의 모습도 흐려진 공기로 인해 시야에서 사라졌다. 직선거리로 불과 70 킬로미터 정도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심리적인 거리는 700 킬로미터도 넘는 곳이다. 정말 마음만 먹으면 이틀이면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지만 내 평생 한 번 가보지 못할 아주 먼 곳이다. 금강산이 설악산의 풍경과 닮아 있다고 생각하면 그 아기자기한 바위 봉우리들로 구성된 모습이 빼어나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가서 그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은 늘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