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눈구경

누구 말마따나 올 겨울에는 정말 원없이 눈 구경을 하는가 보다. 한동안 겨울가뭄이 심했던 기억이 나는데 올 겨울에는 가문 날이 길지 않고 눈이나 비가 꾸준히 내렸다. 아래 도심이나 농촌 평지에는 비가 내려도 해발 1,000 미터 고지에는 눈으로 내렸으니, 쌓인 눈이 녹기 전에 그 위에 또 내리길 반복하니 그야말로 눈 풍년이 아닐 수 없겠다. 3월 3일과 4일 연일 눈이 내렸기에 고인돌 형님과 약속을 잡았다. 일기예보상으로 날씨가 좋은 목요일을 택하여 일정을 정했는데, 다시 확인해 보니 내가 날짜 감각을 잃어서 그런 건지, 그날 친구들과 점심 약속이 잡혀 있었다. 하루에 두 개의 약속이 겹치는데, 하나는 그냥 점심만 먹는 거고 다른 하나는 종일 코스이니, 나는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소백산행 버스표를 예약하였다. 소백산(小白山), 같은 백산이라도 산이 낮아서 소백산인가? 태백산(太白山) 장군봉의 높이가 1567 미터이고 소백산(小白山) 비로봉(毘盧峯)의 높이가 1439 미터이니 해발고도가 100 미터 이상 차이가 난다. 옛날 측량기구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두 산의 높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모양이다. 소백산은 대략 죽령에서 늦은맥이를 거쳐 어의곡 주차장까지 이르는 산 길이가 대략 21 km 이니, 태백산의 당골에서 문수봉과 장군봉을 거쳐 화방재(어평재)까지 약 12 km에 비하면 규모 면에서는 소백산이 오히려 훨씬 크고 장엄해 보인다. 그러니 단순히 산의 크기를 가지고 어느 산이 형이고 어느 게 아우인지 구분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다만, 태백산에는 삼국시대부터 제사를 모시던 천제단이 있고 충청도와 경상도 그리고 강원도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높은 산이다 보니, 우리의 성산(聖山)이 되었고 그렇게 큰 산으로 인식되어 온 것일 게다. 고인돌 형님과 풍기 IC에서 만나 시내까지 걸어가 25번 시내버스를 타고 희방사 탐방로 입구까지 이동했다. 이번에 내린 눈의 양이 많아서 그런지 희방사로 올라가는 도로의 눈도 아직 치우지 않았다. 탐방로 입구에 중장비 한 대가 눈을 치우느라 분주하다. 탐방안내소 직원이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하고 가는 게 좋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 정도 눈이야 그냥 가도 되겠다고 만용을 부리며 조금 오르다가, 거의 무릎까지 올라오는 눈의 양을 보고는 꼬리를 내렸다. 벤치에 앉아 아이젠과 스패츠를 단단히 매고서야 안심하고 탐방로를 걸을 수 있었다. 희방사(喜方寺) 눈은 부드러운 습설이다. 그러나 아이젠에 달라붙지 않는 것을 보니 습기가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걷기에 편안하다. 계곡에 물이 흐르고 돌 위에는 눈이 소복이 쌓인 풍경도 이제는 귀한 볼거리이다. 나뭇가지에도 눈이 쌓이고 온 천지가 하얀 눈 세상이다. 기온은 영상(零上)인 듯 장갑을 벗어도 손이 시리지 않고, 추운 줄 알고 겹겹이 입었던 자켓을 벗어도 춥지 않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시원한 봄바람이다. 어른 허리만큼 굵은 노각나무 군락지를 지나고 다리를 건너니 희방폭포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눈 녹은 물이 제법 많다. 경칩이 지났으니 얼었던 폭포물이 다 녹고 그 주변에만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다. 희방사 스님들도 눈 내린 김에 잠시 쉬는 것인지 그 큰 절이 정말 절간처럼 조용하다. 이럴 때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길을 나설 스님도 없을 터이고, 등산객들도 절 아래 산길로 다닐 터이니 이래저래 절 마당은 겨울동안 눈만 쌓일 것이다. 지붕에서 흘러내린 물이 얼어 만들어진 고드름이 거의 어른 팔 길이 만하다. 연화봉(蓮花峰) 우리는 이런 첩첩 산중에 절을 세운 까닭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너른 들판에 절을 짓기도 쉬울 뿐더러, 탁발 다니기도 훨씬 더 편할 텐데 굳이 이런 산중에 절을 지은 것은 속세와 담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는 뜻일 게다. 나는 그 이유가 군사적인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옛날에는 종교가 정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 지금이야 교통이 발달하여 자동차로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옛날 이 절에 가려면 먹을 거 잠잘 거 챙겨 들고 몇 날 몇 일을 걸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곳이 이런 절을 세운 까닭은 평상시 무예도 익힌 장정 스님이 상주하고 있다가 유사시 군 장병들이 모여들어 장기간 머물면서 적과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지원시설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이 희방사 코스는 소백산으로 오르는 탐방로 가운데 가파름 면에서 으뜸일 것이다. 쇠 난간과 나무계단이 놓여 있지만 장정이라도 가끔 숨을 돌리면서 올라야 한다. 하얀 눈이 사방을 뒤덮고, 나뭇가지에 맺힌 작은 얼음 조각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마치 보석을 매달아 놓은 듯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한발 한발 올라간다. 가파른 경사면이 끝나는 안부에서 하산하고 있는 산꾼을 한 명 만났다. 대구에서 새벽에 올라와 죽령에 주차하고 연화봉 일출을 보고 하산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가 굳이 아침 일출 장면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얼굴 표정을 보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는 비로봉까지 가려고 하였으나 러셀이 안되어 있고 눈이 길 안내 말뚝까지 올라와 겁이 나서 그냥 희방사로 내려가는 중이라고 하였다. 우리 앞에 세 명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기에 우리는 은근히 그들 세 명이 비로봉까지 길을 뚫어 주길 기대하며 연화봉으로 오르는데, 그 중간쯤 가다가 하산하는 두 명의 산꾼을 만났다. 그리고 연화봉에 거의 이르렀을 때 또 한 명을 만났으니, 그들 세 명 모두 비로봉에 가지 않고 원점 회귀하는 셈이다. 우리도 시간을 핑계삼아 비로봉을 포기하였다. 비로봉에 가까워지면서 나뭇가지에 피어 있는 상고대의 모습이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정말 천국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상상하였다. 나무 가지 위에 하얀 눈이 앉아 있고, 그 눈이 녹았다가 얼음으로 다시 얼었고, 그 얼음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철쭉나무는 마치 사진에서나 보았던 바닷속 산호초 같고, 자작나무 속 거제수나무는 그 끝의 잔가지가 한데 엉켜 마치 커다란 빗자루 같은데, 얼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리가 잔뜩 굽어져 있다. 아마 이런 날씨에 적응하기 위해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부러진다는 것을 오랜 세월동안 터득한 삶의 지혜일 것이다. 산에 올라오는 도중 한쪽 아이젠을 잃어버렸는데, 가파른 북사면에는 눈 속에 얼음이 있어 가끔 미끄러진다. 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 하지만 쇠 난간을 붙잡고 아이젠이 있는 오른발을 디뎌가며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정상에 오른다. 연화봉 정상에 오르자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다. 그 사이 햇볕이 구름 속으로 숨어버리고, 눈발이 조금씩 날린다. 멀리 비로봉이 보일 듯 말 듯 시야에서 멀어진다. 죽령으로 하산길을 잡고 오후 두 시가 지났다. 올라오면서 간식을 조금 먹었지만, 점심 시간을 넘겼으니 배가 출출해진다. 연화봉 정상은 바람이 불어 몸이 금방 차가워진다. 비로봉에 대한 아쉬움에 잠시 연화 1봉쪽으로 내려가 보았다. 풍경은 아름답지만 산길에 쌓인 눈이 발목을 잡는다. 올라오면서 만났던 산꾼들 말마따나 비로봉으로 향하는 길에는 발자국이 없다.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다. 죽령으로 향하는 길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듯 발자국이 이리저리 많이 나 있고, 천문대 가까운 곳에는 제설차가 눈을 쓸고 지나간 듯, 눈 더미가 길 가에 쌓여 있다. 우리는 바람을 피해 천문대 건물 입구에 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었다. 벗어 두었던 자켓을 배낭에서 꺼내 입었다. 이제 내리막 길이니 덥지는 않을 터이다. 죽령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제설작업이 잘 되어 있다. 길 가에 늘어선 나무들은 여전히 소백산의 참 모습을 잊지 않은 듯 상고대와 얼음 꽃으로 배웅한다. 천문대 직원이라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사람을 만나고, 연화1봉 대피소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일출을 보고 비로봉에 갈 거라는 중년의 여자 산꾼을 만난다. 이어서 역시 대피소에 예약했다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모두 소백산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설경에 감동한 듯 얼굴에는 행복감이 넘쳐난다.

Hiking/Backpacking

Yeongju-si, Gyeongsangbuk-do, South Korea
bethewise photo
time : Mar 6, 2025 10:01 AM
duration : 6h 50m 13s
distance : 12.3 km
total_ascent : 1018 m
highest_point : 1461 m
avg_speed : 2.2 km/h
user_id : bethewise
user_firstname : 상복
user_lastname : 박
누구 말마따나 올 겨울에는 정말 원없이 눈 구경을 하는가 보다. 한동안 겨울가뭄이 심했던 기억이 나는데 올 겨울에는 가문 날이 길지 않고 눈이나 비가 꾸준히 내렸다. 아래 도심이나 농촌 평지에는 비가 내려도 해발 1,000 미터 고지에는 눈으로 내렸으니, 쌓인 눈이 녹기 전에 그 위에 또 내리길 반복하니 그야말로 눈 풍년이 아닐 수 없겠다. 3월 3일과 4일 연일 눈이 내렸기에 고인돌 형님과 약속을 잡았다. 일기예보상으로 날씨가 좋은 목요일을 택하여 일정을 정했는데, 다시 확인해 보니 내가 날짜 감각을 잃어서 그런 건지, 그날 친구들과 점심 약속이 잡혀 있었다. 하루에 두 개의 약속이 겹치는데, 하나는 그냥 점심만 먹는 거고 다른 하나는 종일 코스이니, 나는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소백산행 버스표를 예약하였다. 소백산(小白山), 같은 백산이라도 산이 낮아서 소백산인가? 태백산(太白山) 장군봉의 높이가 1567 미터이고 소백산(小白山) 비로봉(毘盧峯)의 높이가 1439 미터이니 해발고도가 100 미터 이상 차이가 난다. 옛날 측량기구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두 산의 높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모양이다. 소백산은 대략 죽령에서 늦은맥이를 거쳐 어의곡 주차장까지 이르는 산 길이가 대략 21 km 이니, 태백산의 당골에서 문수봉과 장군봉을 거쳐 화방재(어평재)까지 약 12 km에 비하면 규모 면에서는 소백산이 오히려 훨씬 크고 장엄해 보인다. 그러니 단순히 산의 크기를 가지고 어느 산이 형이고 어느 게 아우인지 구분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다만, 태백산에는 삼국시대부터 제사를 모시던 천제단이 있고 충청도와 경상도 그리고 강원도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높은 산이다 보니, 우리의 성산(聖山)이 되었고 그렇게 큰 산으로 인식되어 온 것일 게다. 고인돌 형님과 풍기 IC에서 만나 시내까지 걸어가 25번 시내버스를 타고 희방사 탐방로 입구까지 이동했다. 이번에 내린 눈의 양이 많아서 그런지 희방사로 올라가는 도로의 눈도 아직 치우지 않았다. 탐방로 입구에 중장비 한 대가 눈을 치우느라 분주하다. 탐방안내소 직원이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하고 가는 게 좋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 정도 눈이야 그냥 가도 되겠다고 만용을 부리며 조금 오르다가, 거의 무릎까지 올라오는 눈의 양을 보고는 꼬리를 내렸다. 벤치에 앉아 아이젠과 스패츠를 단단히 매고서야 안심하고 탐방로를 걸을 수 있었다. 희방사(喜方寺) 눈은 부드러운 습설이다. 그러나 아이젠에 달라붙지 않는 것을 보니 습기가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걷기에 편안하다. 계곡에 물이 흐르고 돌 위에는 눈이 소복이 쌓인 풍경도 이제는 귀한 볼거리이다. 나뭇가지에도 눈이 쌓이고 온 천지가 하얀 눈 세상이다. 기온은 영상(零上)인 듯 장갑을 벗어도 손이 시리지 않고, 추운 줄 알고 겹겹이 입었던 자켓을 벗어도 춥지 않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시원한 봄바람이다. 어른 허리만큼 굵은 노각나무 군락지를 지나고 다리를 건너니 희방폭포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눈 녹은 물이 제법 많다. 경칩이 지났으니 얼었던 폭포물이 다 녹고 그 주변에만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다. 희방사 스님들도 눈 내린 김에 잠시 쉬는 것인지 그 큰 절이 정말 절간처럼 조용하다. 이럴 때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길을 나설 스님도 없을 터이고, 등산객들도 절 아래 산길로 다닐 터이니 이래저래 절 마당은 겨울동안 눈만 쌓일 것이다. 지붕에서 흘러내린 물이 얼어 만들어진 고드름이 거의 어른 팔 길이 만하다. 연화봉(蓮花峰) 우리는 이런 첩첩 산중에 절을 세운 까닭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너른 들판에 절을 짓기도 쉬울 뿐더러, 탁발 다니기도 훨씬 더 편할 텐데 굳이 이런 산중에 절을 지은 것은 속세와 담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는 뜻일 게다. 나는 그 이유가 군사적인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옛날에는 종교가 정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 지금이야 교통이 발달하여 자동차로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옛날 이 절에 가려면 먹을 거 잠잘 거 챙겨 들고 몇 날 몇 일을 걸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곳이 이런 절을 세운 까닭은 평상시 무예도 익힌 장정 스님이 상주하고 있다가 유사시 군 장병들이 모여들어 장기간 머물면서 적과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지원시설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이 희방사 코스는 소백산으로 오르는 탐방로 가운데 가파름 면에서 으뜸일 것이다. 쇠 난간과 나무계단이 놓여 있지만 장정이라도 가끔 숨을 돌리면서 올라야 한다. 하얀 눈이 사방을 뒤덮고, 나뭇가지에 맺힌 작은 얼음 조각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마치 보석을 매달아 놓은 듯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한발 한발 올라간다. 가파른 경사면이 끝나는 안부에서 하산하고 있는 산꾼을 한 명 만났다. 대구에서 새벽에 올라와 죽령에 주차하고 연화봉 일출을 보고 하산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가 굳이 아침 일출 장면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얼굴 표정을 보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는 비로봉까지 가려고 하였으나 러셀이 안되어 있고 눈이 길 안내 말뚝까지 올라와 겁이 나서 그냥 희방사로 내려가는 중이라고 하였다. 우리 앞에 세 명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기에 우리는 은근히 그들 세 명이 비로봉까지 길을 뚫어 주길 기대하며 연화봉으로 오르는데, 그 중간쯤 가다가 하산하는 두 명의 산꾼을 만났다. 그리고 연화봉에 거의 이르렀을 때 또 한 명을 만났으니, 그들 세 명 모두 비로봉에 가지 않고 원점 회귀하는 셈이다. 우리도 시간을 핑계삼아 비로봉을 포기하였다. 비로봉에 가까워지면서 나뭇가지에 피어 있는 상고대의 모습이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정말 천국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상상하였다. 나무 가지 위에 하얀 눈이 앉아 있고, 그 눈이 녹았다가 얼음으로 다시 얼었고, 그 얼음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철쭉나무는 마치 사진에서나 보았던 바닷속 산호초 같고, 자작나무 속 거제수나무는 그 끝의 잔가지가 한데 엉켜 마치 커다란 빗자루 같은데, 얼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리가 잔뜩 굽어져 있다. 아마 이런 날씨에 적응하기 위해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부러진다는 것을 오랜 세월동안 터득한 삶의 지혜일 것이다. 산에 올라오는 도중 한쪽 아이젠을 잃어버렸는데, 가파른 북사면에는 눈 속에 얼음이 있어 가끔 미끄러진다. 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 하지만 쇠 난간을 붙잡고 아이젠이 있는 오른발을 디뎌가며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정상에 오른다. 연화봉 정상에 오르자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다. 그 사이 햇볕이 구름 속으로 숨어버리고, 눈발이 조금씩 날린다. 멀리 비로봉이 보일 듯 말 듯 시야에서 멀어진다. 죽령으로 하산길을 잡고 오후 두 시가 지났다. 올라오면서 간식을 조금 먹었지만, 점심 시간을 넘겼으니 배가 출출해진다. 연화봉 정상은 바람이 불어 몸이 금방 차가워진다. 비로봉에 대한 아쉬움에 잠시 연화 1봉쪽으로 내려가 보았다. 풍경은 아름답지만 산길에 쌓인 눈이 발목을 잡는다. 올라오면서 만났던 산꾼들 말마따나 비로봉으로 향하는 길에는 발자국이 없다.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다. 죽령으로 향하는 길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듯 발자국이 이리저리 많이 나 있고, 천문대 가까운 곳에는 제설차가 눈을 쓸고 지나간 듯, 눈 더미가 길 가에 쌓여 있다. 우리는 바람을 피해 천문대 건물 입구에 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었다. 벗어 두었던 자켓을 배낭에서 꺼내 입었다. 이제 내리막 길이니 덥지는 않을 터이다. 죽령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제설작업이 잘 되어 있다. 길 가에 늘어선 나무들은 여전히 소백산의 참 모습을 잊지 않은 듯 상고대와 얼음 꽃으로 배웅한다. 천문대 직원이라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사람을 만나고, 연화1봉 대피소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일출을 보고 비로봉에 갈 거라는 중년의 여자 산꾼을 만난다. 이어서 역시 대피소에 예약했다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모두 소백산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설경에 감동한 듯 얼굴에는 행복감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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