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seong-gun, Gangwon State, South Korea
time : Jan 4, 2025 9:40 AM
duration : 4h 42m 9s
distance : 11.1 km
total_ascent : 781 m
highest_point : 1148 m
avg_speed : 2.6 km/h
user_id : bethewise
user_firstname : 상복
user_lastname : 박
모처럼 산악회에서 마산봉 산행 스케쥴이 올라왔다. 백두대간을 걸을 때, 그리고 그 뒤로 몇 번 걸었던 길인데 늘 마산봉은 눈산행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우리나라 최북단에 있는 금강산의 남한 땅에 속한 산이니 겨울에는 으레 춥고 한 번 내린 눈이 봄까지 녹지 않는 산으로 기억되는 산이다.
출발하기 전날 산행 대장은 공지를 통해 영하 20도의 차가운 날씨라며 중무장을 당부했다.
아침 일찍 산악회 버스를 타고 강원도로 가는 마음이 설레는데,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기대했던 그런 것과는 점점 거리가 멀다. 작년 2월 마산봉에 가겠다고 나섰다가 허벅지까지 쌓인 눈 때문에 산 아래에서 잠시 놀다가 돌아갔던 기억이 있기에 그래도 명색이 마산봉인데 하면서 끝까지 기대를 놓지 않았지만, 버스가 진부령을 지나 흘2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꿈을 놓아 버렸다.
버스에서 내릴 때 아이젠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배낭에 다시 넣었다. 산대장은 정상부위에는 눈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건너편 향로봉을 보니 산 위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 없는 마산봉
한 때 성황을 이루었던 알프스 리조트가 텅 빈 성처럼 덩그라니 서 있는 뒤편 좁은 산길을 걸었다. 낙엽송 숲을 지나고 돌계단을 오른다. 이렇게 눈이 없으니 걸음도 빨라지고 혹시 신선봉이나 상봉까지 다녀와도 되겠다는 건방진 생각도 들었다.
기온도 그리 낮지 않은 것 같다. 겨울 채비를 단단히 했지만 이런 두터운 파카는 배낭에서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몸에 땀이 난다. 한 시간만에 정상에 이르러 건너편 향로봉을 영상에 담는데도 그다지 손이 시리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비록 눈도 없고 상고대도 없지만 겨울 마산봉의 풍경은 아름답다. 건너편 향로봉 왼편으로 칠절봉과 동글봉 그리고 더 왼편으로 매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웅장하다. 그리고 향로봉 오른편으로 멀리 이어지는 능선은 북쪽 금강산 일원인 것 같다는 생각에 더욱 애착이 가는 풍경이다.
남북과 북미간 한창 평화회담이 오갈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통일이 되지 않더라도 조만간 남북 교류가 더욱 활성화되어 내가 금강산에 갈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생겼었다. 혹시 북한 쪽 백두대간을 걸을 수도 있을 거라며 뉴질랜드 사람 셰퍼가 찍어서 인터넷에 올린 북한 백두대간 사진을 찾아보기도 했었다. 그 전에 향로봉에라도 올라가 보겠다고 군부대에 팩스를 보내 허가를 받아보려고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북미 대화가 무산되고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간 분위기는 빙하시대로 급히 전환되었고, 나의 북한 여행에 대한 기대도 그저 망상에 지나친 것이었다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역사를 공유하며 같은 문화를 갖고 있는 한 민족이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서로 다른 사상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원수처럼 지낼 수 있을까?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과는 대화도 할 수 없는 것일까? 북한에 가족이나 친지를 두고 있던 사람들은 이제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분단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륙과 담을 쌓고 사는 섬나라 사람들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지키기 위해 저렇게 철통같이 휴전선을 지키고 비싼 무기를 사들여야 하는 걸까? 과연 내 살아있는 동안 저 장벽이 무너질 수 있을까?
참 신기한 일이다. 세계 어느 나라라도 손 쉽게 갈 수 있는 세상인데 어째서 가장 손 쉽게 갈 수 있어야 하는 나라에는 얼씬도 못하는 세상이 되었을까?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를 신념으로 갖고 있는 국가이고, 북한은 공산 독재주의를 갖고 있는 나라라서 서로 대화조차 할 수 없는 것일까?
병풍바위로 가는 길에 황홀한 상고대를 기대하였으나 발 아래 눈이 조금 얼어 있을 뿐 이곳도 풍경은 마찬가지였다. 지난 11월에 왔을 때에 비하면 지금은 봄날을 기다리는 늦겨울의 풍경이다. 정말 곧 털진달래가 꽃망울을 터트리며 피어날 것 같은 분위기다.
나처럼 혼자서 온 사람들이 동행하면서 걸었다. 모두 나처럼 엄청난 눈산행을 기대하면서 찾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발도 빠르다. 병풍바위를 내려오면서 빠르게 나를 앞질러 나갔다.
암봉(천지봉 1,007 미터)
바위가 절벽을 이루고 그 바위에서 떨어져 나간 돌이 너덜겅을 이루고 있는 봉우리라서 이름을 암봉(岩峰)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그 아래는 큰새이령 (대간령 大間嶺)이고 그 대간령 너머에 우람하게 서 있는 봉우리가 신성봉이고 그 너머가 상봉이다. 나무가 자라지 않는 바위 봉우리이니 그야말로 일망무제(一望無際) 시야가 끝없이 펼쳐진다. 서남쪽 끝에 한계산부터 능선 위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가리산 주걱봉과 설악산 서북능선에 삼각형으로 올라서 있는 귀때기청봉이 보인다. 동쪽 발 아래에는 고성군 도원리의 도원 저수지와 동해바다가 펼쳐져 있다.
차가운 바람이 강하게 불어온다. 암봉을 내려와 새이령으로 내려오는 길에 햇볕이 드는 따뜻한 양지에 앉아 빵과 커피로 점심을 먹었다.
마장터
새이령은 예전에 장사꾼들이 인제에서 속초 또는 고성으로 넘나들던 고개이다. 마장터는 그 당시 상인들의 물건을 싣고 다니던 말을 사고 팔던 마장(馬場)이 섰던 장소라고 한다.새이령에서 마장터까지 2.4 km 이고 또 새이령에서 도원리까지 5.8 km 이다. 마장터가 끝이 아니다. 거기서 큰 길이 있는 박달나무 쉼터까지 2~3 km 는 더 나가야 한다. 옛날 이런 험한 고갯길을 등짐 지고 넘나들던 장사꾼들의 수고를 짐작할 수 있겠다.
마장터로 내려가는 길은 크고 작은 냇물을 여러 번 건넌다. 모두 단단한 얼음으로 덮여 있다. 나와 마장터까지 동행한 사람은 앞으로 3년 뒤에 은퇴할 예정인데 그 때 가서 여행할 계획이 나의 바램과 많이 달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토 순례를 해 보고 싶다고 하였고, 세계 산들을 오르고 싶다고 하였다. 텐트를 들고 백두대간을 이어서 걷고 싶다고 하였다.
박달나무 쉼터
생각보다 너무 일찍 하산하였다. 서어나무가 많이 자라는 계곡길을 빠져 나오자 오래 묵어 풀이 무성하게 자란 밭이 나타나더니 금방 널찍한 계곡이 나온다. 박달나무 쉼터 주인에게 왜 이 장소 이름이 박달나무 쉼터냐고 물으니 예전에는 저 건너편 설악산 사면에는 박달나무가 많이 자랐다고 한다. 30년 전에만 해도 박달나무가 많아서 그리 불렀다는데 지금은 다 없어졌다고 하였다. 박달나무 쉼터 산장 주변에는 100 년쯤 되어 보이는 소나무가 많이 자란다.
버스가 기다리는 용대리 인공폭포 있는 곳까지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약 1.3 km를 더 걸었다. 높이가 100 여 미터는 되어 보이는 인공폭포가 얼어서 큰 빙벽을 이루고 있고 빙벽 동호인들이 클라이밍을 즐기고 있었다.
도로 옆 휴게소 뒤편에는 백골병단전적비(白骨兵團戰跡碑)가 세워져 있다. 6.25 때 1951년 1월 채명신 장군 휘하로 제11, 12, 13 연대의 총 642명으로 된 백골부대는 그해 2월~3월 오대산, 설악산 일대에서 적69여단 소속 정치군단을 습격 중요 정보를 입수하여 수도군단에 통보하였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한편, 빨치산을 공격하여 309명의 포로를 생포하고 120명을 사살하는 등 전적을 이루었으나 여러 전투를 치르면서 아군에서도 적지 않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생존 병사들은 오랜 세월 백골병단의 전적을 인정받고 특별법 제정을 이루었다.
출발 예정시간인 오후 4시 30분이 가까워지자 단체로 온 사람들도 식사를 마치고 하나 둘 차에 올라탄다. 모두들 기대했던 눈 산행을 하지 못해 아쉬움은 있었으나 무사히 산행을 마친 것에 감사하며 산행을 마무리하였다.